"금전적 실패를 도덕적 해이로 판단당하는 현실과" -빅이슈 59호 편집장 글머리 중. 


여느때처럼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건너편의 그는 책자를 손에 쥐고 팔을 들어 외치고 있었다. 그가 외치고 있는 책자의 이름은 그가 홈리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당당하게 서있는 그의 자세와 표정과 눈과 소리는 그러한 사실에 내가 익히 보아오던 홈리스들의 모습에 전혀 상응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지나치던 나는 그를 잠시 지난 지점에서 잠깐 멈춰서서 간간히 사서 보던 남성지들이 요즘에 볼 내용이 없더라는 생각을 반추해내고 몇가지를 좀 더 생각해보고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 새로 택배로 얻은 옷이 스스로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다가가 돈을 주고, 잡지를 하나 얻었다. 오늘같은 날씨에 몇시간동안 서있으면서 그렇게 외쳐대고 있어서인지 돈을 주면서 닿은 손 끝이 차가웠다. 이에 책자를 받아 돌아서면서 나는 겸연쩍었다. 그리고 약간의 무언가 섭섭함과 미안함과 고마움과 등의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러다 나는 내가 딱히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는 없음을 생각해내고,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잡지 안의 저 글을 보고 그의 그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2013. 5. 10.)

'짧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 글은 무얼 쓸까  (0) 2021.01.23
오라티오  (0) 2021.01.22
「홀린 사람」- 기형도  (0) 2020.07.14
투표를 하러 근처의 동사무소를 방문했다  (0) 2020.07.10
솔직히 말하자면..  (0) 2013.08.03
Posted by 간로
,



  몇년동안 완전히 잊고있다가 재개봉 소식을 접하고 보러갔다. 그래서 내용을 거의 기억을 못하는 상태에서 봐서인지 장면들을 보며 내용전개를 뒤늦게 떠올려가면서 봤다. 아, 그랬었지. 이렇게. 몇번 본 영화치곤 생각보다 생경하게 본셈. 


  리마스터링 감독판이라서 50여분 정도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별로 이질감은 못 느끼는것으로 봐서 그렇게 원작의 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 추가된 것 같진 않다. 언젠가 DVD 나오겠지 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엔조가 저 아래가 훨씬 좋다고 하는 말이나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지만 쟈크처럼 위로 올라오기 위해 그 이유를 찾아내야만 하는 정도의 인간은 아닌듯 하다. 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정도로는 속되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 출가했다고 하지. 주인공의 선택도 그러하고. 남자에게 가정을 만든다는 건 여러가지를 의미한다. 결국은 세상에 뿌리내린다는 것.(보다 엄밀히는 세상의 '방식'에)


  그랑블루를 예전에 봤을때는 주인공이 감독을 상징한다고 봤었는데 다시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라. 엔조도 쟈크도 모두 감독 스스로를 드러내는듯.


  뤽 베송은 주인공이 결국 바다아래를 선택하는 이 영화를 내놓은 후에 마틸다가 죽은 레옹이 남긴 화분을 비로소 대지에 뿌리내리게하는 '레옹'을 찍는다. 그리고 그는 몇년후, '택시'를 찍기 시작한다. 학부 1학년 때 듣던 어느 기초교양수업에서 뤽베송의 궤적을, 어느 강사선생님은 이렇게 정리해주시더라.


(2013. 7.)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대종사(2013. 8.)  (0) 2013.09.02
플레이스비욘드더파인즈(2013. 8.)  (0) 2013.09.02
인생(1994)  (0) 2013.08.12
가족의 탄생(2006)  (0) 2013.08.12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0) 2013.08.12
Posted by 간로
,

인생(1994)

영화 2013. 8. 12. 18:18



  공산당 정권의 성립 이전에 나타나는 도덕은 가족이나 돈거래와 같은 사적 공간의 도덕이었다. 그 도덕은 국가로부터 직접 연원하지 않는 사적 부문의 자연적 공동체의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당 이후에 사적공간의 도덕은 공용식당에서 아들에 대한 반동이라는 비판이나, 주인공의 아들이 철이 더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칭찬(특히, 이것은 가족보다 공적 대의를 더 중시하는 태도였다.)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국가 공동체 차원의 공적인 것으로 그 성질이 변화한다. 사적 부문은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공적 부문이 전분야를 전면적으로 총괄한다. 이러한 변화에서 공적 도덕의 전 부문에 대한 총괄적 지배는 결혼식이나 예술에서도 등장하는 마오의 초상에서 드러나듯이 마침내 완전해지는 듯이 보인다.(이에 비해 사적 예술인 그림자 놀이는 결국 불태워진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그러한 공적 부문의 확장 속에서 그에 대한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다.(심지어 이것은 관객에게마저도 그러하다. 그들은 공적부문에 대한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공적부문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허위적인 언행이다. 그들의 진심이 드러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공적공간에서가 아니라 전면적인 공적공간의 포섭으로부터 끝까지 사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가족이라는 공간에서이다.(도박 근절이라는 남자주인공의 변화와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는 가족을 매개로 한 것이다.) 공적 부문의 전면화 속에서도 주인공들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가족이라는 사적 부문이라는 점에서 가시적 공적 영역은 매우 확대되어있으나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이 드러난다.(이 소외는 공적부문에 투신했던 위원장과 지역책임자들이 결국 숙청의 대상으로서 조사받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결국 모두 공적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다.) 이를 넘어서 공적 영역은 주인공들의 두 아이를 죽임으로써 사적 영역의 행복을 해치는 것으로서 나타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적부문으로의 통일적 일원화 프로젝트는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희생을 겪은 주인공들은 결말 부분에서 가족을 기억하는 손자를 칭찬하고(이것은 이웃들의 아들에 대한 칭찬과는 다른, 가치의 전도를 보여준다.), 병아리를 그림자 놀이의 상자에서 키우는 것에서 도덕과 삶이 다시 변용-특히 가족적 가치에로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이것은 중국의 90년대부터의 사적부문에 대한 재발견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2007.)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레이스비욘드더파인즈(2013. 8.)  (0) 2013.09.02
그랑블루(2013. 7. 재개봉)  (0) 2013.08.16
가족의 탄생(2006)  (0) 2013.08.12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0) 2013.08.12
공동경비구역 JSA (2000)  (0) 2013.08.12
Posted by 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