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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있을 것인가'는 어떠한 답을 가져다 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유명한 책이라는 것만을 알 뿐이다.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도 다분히 그렇게 시작되긴 했다. '무언가 있을 것이다.' 그것 외에 내가 거기에 접근한 이유가 있었을까. 그거 외엔 없었지만 읽다보니 뭔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왜 보는지 이해가 되었다. 삶의 근본에 도달하게 해주는 그 느낌이 있다. 지적 서술이라는 것이 과연 철학이 밝히고자 하는 여러 근본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에 도달하게 해주느냐는 논쟁적일테지만, 나는 그것이 가치있다 생각한다.
사실 '그런 부분들은 말해질 수 없다'는 말에 어느 정도 맞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재로서는 나는 문학이나 시보다는 철학적 논의가 더 가치있게 여겨진다. 근본에 다가선다는 차원에서. 문학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널리 읽히며 일부는 불멸의 대상이 된다. 지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나는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가 없는거다. 거기엔 '무언가 있을 것'인가.
이러한 가정에 적절한 답을 해줄만한 인간은 현재 대화가능한 내 주변 범위에 있지 않다. 아니, 못하다. 그러면 방안은 하거나 안하거나 둘 중 하나다. 끈덕지게 보다보면 무엇이 있든가, 아니면 역시나 하면서 던져버리게 될거다.

다 쓰고 나니, 나름의 결론이 나온다. 시간이 남으니 일단 도전하는 것이 맞다는 것. 일단 달려들어보자는 거다. 후회할 일은 없을테니까.

 

(5년전 쓴 글. 그러고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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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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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치관련 논쟁을 볼 때마다 항상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는 말입니다.
저는 현재까지는 여기에 부정어를 던진 적이 없네요. 요즘 세태에서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것보다 다름의 범위를 좀 넓게 긍정하는 편입니다.

민주공화정이라는 정체 하에서의 공동체에서 살아가기로 했다면 여기에 다른 대답을 하는게 불가능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거에요, 삶은 비극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인간 존재에게는 그걸 긍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항이 없다는 거. 그걸 정치세계에서 가장 강하게 반영하는 정체가 데모크라시가 아닌가 합니다. 니체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지만, 사막을 건너는 위버멘쉬가 정치세계에서는 자기와 다름에 대해서 한번더! 라고 외치는게 더 어울려보여요.
저는 결여투성이의, 어찌보면 처절할 수도 있는 이 체제가 온전한 동의여부를 떠나서 가장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Posted by 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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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뭘 쓸까 생각 중이다.

 

홍콩의 화양연화는 원래의 구상대로면 5편으로 끝날 거 같고.

맨 처음의 계획으로는 꽤 긴 글 하나로 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위대한 텍스트는 무한히 해석이 가능하다.

아무 해석이나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타당한 해석만으로도 그 텍스트에 대한 수많은 글들이 나올 수 있다.

익히 들어본, 그러나 아무도 쉬이 읽지는 않는 불멸의 고전들을 떠올리면 될거다. 글 하나, 책 하나가 얼마나 무수한 다른 글들을 낳았는가.

이런 기준에서라면 나는 화양연화라는 영화도 위대한 텍스트라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위대한 영화가 그러하듯이.

화양연화로 글을 쓰라고 하면, 백편이든 천편이든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브루스 웨인의 다크나이트'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전체를 배트맨이 아닌, 인간이자 시민인 브루스 웨인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글이 될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제이슨 본' 시리즈를 다룰까 한다.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3부작. 부가적으로는 최근작인 '제이슨 본'까지 언급하려 한다. 

이건 7~8년 전 쯤에 써놓은게 있다. 다만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렇게 현학적으로밖에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걸 그대로 날 것으로 올리기엔 너무 빡센 글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초안도 있으니, 쉽게 풀어서 다시 여러 편으로 나누어 써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둘 중 어느 걸 쓰든 간에 글 자체가 만만하진 않을거 같다. 어찌되었거나 인문/철학 얘기랑 같이 하게 될테니까.

 

홍콩의 화양연화 번외편은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재밌게 찰지게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나온 글이다. 반응이 좋다면, 다크나이트를 쓰든 제이슨 본을 쓰든 그런식으로 어떻게든 더 웃기고 찰지게 쓰려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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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티오

짧은글 2021. 1. 22. 18:53

정치사상(또는 정치철학)은 철학이나 법학과 같은 '사이언스'에 속하는 분과가 아니라 '레토릭'에 속하는 분과라는 점이다. 오늘날 정치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독자들의 합리적 동의를 얻기 위해 합리적인 주장들을 고안해내려는 목적에 맞춰 저작활동을 하고 논문을 작성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나 다른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정치사상을 '말하는 기술'에 속하는 활동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즉 그들은 단지 독자들의 합리적, 이성적 동의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까지 움직여냄으로써 어떤 정치적 아이디어에 대해 그 독자들에게 찬반을 설득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서 저술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성을 '말하는 기술'로써 보강하고자, 즉 '라치오ratio'를 '오라치오oratio'로써 보강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범사례, 비유, 실제 이야기, 격정적 권고 등 고전 레토릭의 모든 수단들을 즐겨 동원했다.


-모리치오 비롤리, <공화주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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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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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하러 근처의 동사무소를 방문했다.

몇몇의 남자들이 앞에서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고 입구까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고, 내 앞의 할아버지가 그 앞의 아주머니와 거리를 두고 줄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할아버지가 줄을 서있는 것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그 뒤에 서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백발의 할아버지는 곧 자신의 위치를 당겨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내가 제대로 줄을 섰음을 알았다.

 

줄을 선 것은 투표줄이 아니라 체온계를 들이대는 줄이었다. 앞에서의 직원 한 분이 체온계의 불빛을 투표를 위해 온 사람의 이마에 겨냥하여 체온을 체크하고 있었다. 곧 내 차례가 왔고 빠른 걸음에 이마에 땀이 맺힌 탓인지 2~3번 재도 측정에 실패한듯 보였다.

, 제가 뛰어 와서...”

잠깐 당황해하는 직원아주머니에 나는 겸연쩍어 말했다. 마스크 안의 인중에 땀이 맺힌게 느껴졌다.

곧 제대로 체온이 나왔고 나는 안도하며 윗층의 투표소로 올라갔다. 가는 곳은 두 곳이었다. 한 곳은 해당지역구, 다른 곳은 그 외의 지역구. 나는 일부러 옆의 다른 지역구에서 왔으므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줄이 더 적었다. 사람들끼리 거리를 두어 줄을 서게 유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닐장갑을 꺼내어 착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곧 손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곧 내 차례가 오고 운전면허증을 꺼내어 보여주고 인쇄된 투표용지를 받았다. 한 장은 짧았고 다른 한 장은 매우 길었다. 다른 한 장의 기나긴 용지에 찍혀있는 무수히 많은 정당명들은 읽어볼 생각도 들게 하지 않았다. 다만 무척이나 다종다양한 그 이름들의 나열을 보면서 잠시 현기증 비스무레한 감각을 느꼈다.

 

내 한 장의 투표는 가치있는 일인가? 총유권자수가 4천만은 넘는다하는데, 그렇다면 나의 표가 가지는 가치란 산술적으로 0.0000025%정도에 해당한다. 그래, 이번은 총선이니까 선거구 평균 유권자수인 20만명으로 어림해보면 0.0005%. 어느 쪽으로 따지든 그 비중은 대단히 미미하고 하찮다. 전체에 비하면 0이라고 봐도 되지 않나? 그럼에도 내가 굳이 이 시간을 허비하여 줄을 서면서까지 이곳까지 온건 무슨 동기라고 봐야하나?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산술적으로 그러하다.

 

나의 정치인 혐오는 오래되었다.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정치인 혐오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정치인 혐오는 정치자체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사가 깊다. 아렌트에 의하면, 아마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사람은 플라톤일거다. 진리를 전한다 믿던 자기 스승을 죽게 만든 정치세계를 좋게 볼 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이상적인 공동체는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를 보고 돌아온 철학자가 모든 걸 알아서 다스리는 나라다. 무엇이 진리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다투는 정치란 진리를 가리는 장애물일 뿐. 어떻게 보면 플라톤은 그런 정치세계를 일소해버리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을거다. 여러 사람이 떠드는 다툼의 정치공간은 좀 그만하고 다 아는 사람에게 맡기자. 정치보다는 진리를!

이게 뿌리깊은 성향인게 철학자가 다스리지 않는, 그래서 부득이 정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사람들도 일정부분 정치혐오자일 밖에. 그게 이전에 교과서처럼 언급되던 민주국가의 투표율 하락으로 표출되든,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든, 트럼프 당선으로 실현되든 간에. 정치를 혐오해야 메시아를 찾을 수 있다.

 

맥락은 다르겠지만, 리버럴리즘이 주장하는 최소국가도 어느 정도는 이런 혐오스러운 정치부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와 관련한 한 태도이지는 않을까. 리버럴리즘이 곧 정치혐오라 하기는 어렵겠지만. 국가로 대변되는 정치는 사회의 실패의 경우에만 개입하고 나머지는 사회의 자율성에 내버려두자는 주장. 맥락에 따라서, 여기서 사회란 경제일수도 있고, 국가 이전부터 존재한 자연권을 가진 개개인들의 공간일수도 있을거다. 그리고 개개인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 국가는 끼어들지 말라는 태도. 왜냐하면 그 권리라는 거는 국가 이전부터 있는 자연권이고 따라서 사람간의 합의 이전부터 존재하는, 정치 이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거는 정치가 바로 건들 수 없고 그게 침해될 때나 국가가 형벌권 등으로 사회에 개입하고, 공익을 위해 제한하고 싶을 때는 정치 통해서 법률로 최소한으로 해라. 그러니까 그 법률 정하는 대표자는 자연권자들이 투표에 의해 뽑아야겠지. 이게 정치적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치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권리'의 문제로 넘어간다. 권리의 윤곽이 입법자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리되면 원칙적으로 이후는 정치가 아니라 법의 문제일 뿐.

 

나는 인간사회에서 정치란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하면서 기대하는 차원에 비한다면 당연히 개차반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데, 이러면 당장 쉽게 나올수 있는 결론은 위에서 다룬 것처럼 똥통쓰레기인 정치 부문을 최대한 줄이자는 입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항상 똥통이니까. 정치혐오자의 당연스런 결론이다. 앞서 말했지만 최소국가라는 태도가 이러한 방향성의 하나로 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그렇다고, 이게 맞느냐하면 물음표가 계속 붙기도 한다. 정치라는 건 인간집단으로 이뤄진 세계의 다른 부문을 좌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정치가 사회를 지배한다면 그 사회의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나치독일의 우생학 사례를 굳이 들고오지 않더라도 상상가능한 일이다. 과학적 진리 외에 다른 부문은 더 취약하다. 이미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 사회 현상에 대한 해석이 무척이나 달라지는걸 포털 기사댓글만 클릭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인간 사회에서 정치가 가장 근본적이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래디컬하기도 한데, 이게 딱 68을 위시한 신좌파가 리버럴까면서 하는 얘기이기도 했다. 부르주아 너네가 말하는 그 '권리'라는게 정말 자연적이고 당연한거냐? 그거 부르주아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들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는 그거 다 까고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만들어보자! 그게 뉴레프트의 한 레퍼토리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이 슬로건은 지금 시대에서도 모든 급진적 시각에서는 당연히 깔고가는 전제다. 국가/정부를 넘어서 일상적인 문화에도 정치가 있다고 하면서 미시정치를 열어젖힌다.

 

그런데 사회의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다투어보는 래디컬한 정치가 정치의 잠재적인 폭이라 해도 항상 실제로 그러한 식으로 사회를 굴러가게 하려는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면 사회의 어떤 것도 안정적일 수 없다. 사고실험 속에서라면 모를까, 공동체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니까 다소 영속적인 성격이 있어야만 한다. 모든 걸 공적으로 다 뒤집고 의문시해 볼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하겠는가. 그래서, 결국은 정치혐오에서 비롯되는 정치일소와 래디컬에서 비롯되는 정치만능 사이에서 어딘가 균형점이 불가피하다. ‘인간사회에서 어디까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정치에, 그렇지 않은 부분은 다른 부문에. 리버럴리즘도 그 물음에 대한 한 대안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거다.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정치라면 당연히 다툼이 일어나고, 그러라고 있는게 정치고, 답이 있기보다는 견해들이 있는게 자연스럽다. 앞선 생각에 따르자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의 영역은 아닌 거고 그게 정치가 일어나야 할 일이니까. 그래서 진리의 영역이 아닌 정치는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어디에서나 진리를 갈구하는 성향이 있고, 진리를 상정해야 세계는 투명하고 아름다울텐데, 진리가 없는 세계는 혼돈이고 그게 더군다나 돈과 권력도 가져다주니까 그걸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생각하면 다소간 똥통쓰레기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거다.

플라톤은 철인왕을 말했다지만,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철인왕이 있기 전의 정치세계란 플라톤이 살던 당시의 아테네 민주정일텐데 그건 이런 혐오스런 정치세계 아니겠는가. 그러면 굳이 아름다운 진리의 이데아 세계로 나갔다 온 철인이 굳이 동굴로 돌아올 이유가 어디에 있을지.

 

정치인들을 덜 혐오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 있겠지만 내가 '사랑'할만할 아이돌이 있을거라 여기는건 글쎄... 극히 순진하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공동체에 유해할거라 생각한다. 그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볼 때, 다른 파벌에 속한 직업정치인들 사이의 거리와, 직업정치인이 표를 갈구하는 유권자 사이의 거리 중 어디가 더 멀까. 정치인들이 공적 인물로서 외치는 거시적인 슬로건이 아니라 유권자와 같은 사적인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미시적 삶의 방식을 보면 그 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상대 파벌과의 정치인과는 무척이나 다른 것처럼 말하고 구원자인 척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척을 통해서 자신이 계속해서 재고용되기를 갈구한다. 그럼에 있어 필요한 확실한 지지층을 다지는 건 비정규직을 조금이나마 덜 불안정하게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에 해당한다. 그래서 정치인의 입장에서 정치과몰입자들의 존재는 위안이 된다. 상대편에 대한 과몰입자가 있는만큼, 자신에게도 그러할 것이기에.

대의 정치의 대표자들은 서로 죽고 죽이다 다같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여야만 하지 않나. , 섹스, 권력이 모인 곳은 인간의 욕망이 극한이 도달하는 곳이고 결국 타락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권력을 탐하러 사람들은 몰려들거고, 인간사회에 그런 리치왕들은 있어야만 하니까. 그럼 정치인들은 다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데 왜 필요하냐, 그 과정을 통해 국민들이 얻는 효용이 조금씩이라도 늘거나 혹은 정치부문으로부터 얻는 피해가 줄기만 하면 된다. 정치인은 소모품이어야 한다. 숭배의 대상은 정치가 아니라 다른 데에서. 정치인은 모두 어느 정도씩은 쓰레기여도 된다. 사회적 폐기물로서 온전히 청산될 수 있다면. 그래서 정치혐오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더 재생불가능한, 시급히 도축해야 할 폐기물인가가 중요하다. 열정이나 흥분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시니컬한 비관주의자만이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어느 쪽 폐기물이든 완전히 폐기되지 않을 때 혐오는 더 극에 달한다. 엄대엄이야말로 극히 혐오하는 정치적 결과물이다. 결국 이번에도 아무도 폐기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상대에게 비난을 서로 떠넘길 수 있을테니까. 그걸 통해서 적대적 카르텔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정치과몰입자들은 우리편의 문제는 보거나 언급하기를 회피하기 때문에 콘크리트화되고, 우리편 정치인의 공고한 재고용창출에 이바지한다. 기사의 장기말이 도리어 기사를 자기의 장기말로 부린다. 그게 직업정치인들이 자신의 고용주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과몰입자들을 정치보다 혐오한다. 정치에 대한 과몰입은 다른 방식으로, 이를테면 미시적인 사적 세계에서 삶의 유의미성을 얻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의 삶이 그러하지 않다는 위안을 얻으며 열광에 차오르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나의 사막같은 삶을 명징하게 빛나는 사회정의-상대방의 일소로 귀결되는-로 나아가는 고행을 수행하는 우월하고 더 깨어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고, 사적 유대감이 없을지라도 동지와의 일체감은 나의 부족한 사회적 네트워크에서의 연대감을 공고하게 보상해준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열광이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소외되지 않은 인간보다 소외된 인간만이 그토록 상상의 대상에 열광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광신적 종교와도 같다. 그리고 그 종교인의 교리란 대부분 극단적인 마니교/조로아스터다.

그렇다고 정치혐오의 태도로 정치를 완전히 회피하는 것도 완전히 긍정하기는 어려워보이고. 그건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재난과 같은게 아닐까. 이게 나의 딜레마다. 정치를 혐오하나 외면하기도 여의치 않다. 고통투성이의 인생과도 같다. 나는 다만 투표지를 들고 기표소로 갈 수밖에.

 

기표소는 평소와 달리 천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씩은 뒤에서 보인다는 것인데, 나는 가장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더욱 그럴 우려는 있어보였다. 가장 안쪽 자리는 누군가 이미 기표하고 있었다. 뒤에서 보일 우려가 있으면 어떠랴 싶었다. 누가 일부러 훔쳐보지도 않을 것이고 훔쳐본들 그게 무어 대수랴.

 

기표소에서 도장을 찍으려는 나는 이 공간이 지극히 개인적 공간임을 느꼈다. 여기는 누가 끼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몇시간 동안 고민하며 서 있다 한들 누구도 나를 끌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실제로 그러하진 않겠지만, 투표소 시간이 마감하지 않는 한에서는 나는 영원히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다. 여기는 법적으로, 아니 헌법적으로 보장된 나의 개인적 정치공간인 것이다. 여기에 끼어드는 것은 위법적인, 아니 위헌적인 사태이다.

이걸 흔히 비밀투표라고 부른다는 걸 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정치공간. 정치공간은 타인을 전제로 한다는 점-그게 공동체의 최소조건이다-에서 개인적인 정치공간이라는 것은 일정부분 모순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과의 대화만이 가능할 이 개인적 공간이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무수한 개인들이 국가라는, 그것도 근대국가라는 저 위대하고 창망한 거대한 체계에 자신의 의사를 온전히 반영하게 하는, 혹은 정치비정규직에의 평생고용을 꿈꾸는 대표자라는 기득권층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정치는 아주 넓게보면 사람간의 상호작용이지만, 그리고 선거도 그것의 한 형태이겠지만, 그에 앞서 개인에게 온전히 자신의 의사에 집중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게 얼마든지 개인을 압도할 힘과 크기를 가진 이 근대적 민주주의 국가에 맞선 무력하기 그지없는 작은 개인들의 선언으로 보인다.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면서 이 지극히 개인적인 정치공간이라는게 그다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지난날의 유시민이 군대에서 투표를 할 때 공공연히 여당을 찍으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야당을 찍은 투표용지를 당당히 보여주며 투표함에 넣었다는 일이 떠올랐다. 군복무를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당을 찍은 투표용지를 군간부에게 보여주며 투표함에 넣었을까. 나는 스스로의 직업을 지식인이라고 TV에서 칭하던 최근의 유시민의 모습도 반추되었지만 징집된 병사의 신분으로 그러던 지난날의 유시민의 기개마저 지워버리기는 어려웠다. 지난 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표소에서 이런 나의 이런저런 반추도, 누굴 찍는지 보여져도 상관없다는 거리낌 없음도 호사스러울 수 있다. 굳이 지난날의 한국이 아니라해도 개인적 공간에서의 투표행위라는건 생각보다는 당연하지 않다. 그 먼 옛날의 로마도 민회에서는 켄투리아 단위의 집단투표가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나. 나의 이 지극히 개인적 공간은 또한 역사적 산물이며 또한 정치적 산물이다.

 

오늘날에도 모든 투표가 비밀투표이지는 않다. 대표자를 뽑는 유권자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이 뽑은 대표자들은 모든 투표가 공개된다. 대표자라는 사람들이 국회 본회의에서 안건을 통과시킬 때 올라온 안건에 대해서 누가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는 즉각적으로 공개된다. 그들의 투표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이다. 그들은 외부의 다른 이들의 의사와 무관히 자신의 의사에만 충실하게 투표를 할 수 없다. 그들의 밖에는 법안을 둘러싼 여러당의 당론이 있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당장 정치인으로서의 밥줄이 끊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순전한 개인이라기보다는 한 명의 국가기관인거니까 불가피하다 하겠지만 온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나 스스로하고만 마주하게 되는 개인적 정치공간은 물리적인 기표소만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누굴 찍었는지 밝혀져도 상관없다는 거리낌 없음도 얼마든지 그걸 가능케 할 수는 있다. 정치적 박해. 인간이 살아오면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대로 표출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무척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적과 친구를 나누는 것이라는 모 나치 정치철학자의 얘기는 위험하지만, 핵심을 찌른다.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가 공개된다면 거대한 국가나 다른 힘 있는 사람이 적으로 규정한 사람은 얼마든지 보복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박해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회라면 비밀투표가 아니어도 비밀투표와 같은 개인적 정치공간을 얼마든지 구성해볼 수 있다.

굳이 권력자가 아니라고 해도 다수나 혹은 소수의 인간들로부터 얼마든지 해코지당하기는 건 민주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나 정치과몰입이 악덕이라기보다는 미덕으로서 찬양될 수 있는 사회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비밀투표란 이런 정치적 박해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주는 기능도 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누구도 투표에 있어서 자신의 의사 외에 타인의 의사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이 뭐라하든, 자기 생각에 따라 투표하면 된다. 그렇게 해도 자신의 정치적 선호가 밝혀져서 공동체에서 축출되거나 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이런 개인적 정치공간을 우리의 법은 꽤나 강고하게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싶어하는데, 이를테면 투표일에 임박한 시점에 여론조사결과의 공표를 금지하는 것이 그렇다. 전략적 투표의 가능성을 차단하면서까지 이러는 이유는 헌재의 합헌 결정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주로 밴드왜건 효과 때문일텐데, 다수에 편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투표의 결과를 왜곡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이다. 그러니까, 선거법은 다른 사람의 견해가 어떠한지로부터도 독립된 정치적 판단의 공간을 개인에게 주고 싶어하는거다. 그것도 역시 정치적 의사라 할 수 있는 전략적 투표의 가능성을 봉쇄해서라도.
흥미롭게도 이런 개인적 정치공간에서 이뤄진 투표행위는 투표자 스스로에 의해서 공개되어서도 안 된다. 이 공간이 온전히 개인의 투표권 보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되기 어려운 이유다. 개인의 권리라면 권리의 성질상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선거법은 기표자가 고의적으로 공개한 투표지를 무효처리한다. 물론 가장 큰 취지는 자신이 투표를 어디했는지를 인증할 수 없게 하여 표를 사고파는 행위를 막겠다는 것이지겠지만, 그런 취지이기만 하다면 사후처벌을 강화하면 되는 것 아닐까. 비밀투표가 유권자 개인의 권리이기만 하다면 자기가 스스로의 비밀투표권을 포기하고 공개하겠다는데 굳이 그 공개된 투표지를 무효처리할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공개행위가 여론조사 결과공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개인적 정치공간에 압력을 가할 것을 우려하는건 아닐까.

한국의 선거법이 보장하는 비밀투표의 공간이란 오묘하다. 그리고 시끄러운 바깥 정치세계와는 달리 더없이 고요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공간은 기표소가 아니라도 이미 있지 않나. 자기자신과 더불어 다만 고요히 돌이켜볼 공간이.

 

이런 고립된 공간에 홀로 있던 나는, 투표지의 몇 항목을 훑어보고는 기표소의 도장을 들어 두 군데에 기표했다. 기나길기 그지없는 비례투표지를 어떻게 접을까를 잠시 고민하고는 적당히 아무렇게나 접어 관외투표자 봉투에 넣었다.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후련한가? 귀찮은 일이다. 귀찮고도 하찮은 일.

 

이런 저런 상념을 뒤로 하고, 나는 봉투를 들고 기표소를 나왔다. 도장으로 두 군데에 기표하고 접은 투표지를 넣은 봉투를 투표함에 넣었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사람들은 줄 서 있었다. 나는 비닐장갑의 바깥 부분이 맨살에 닿지 않게 세심히 벗어 폐기봉투에 버리고는 역시 여전히 사람투성이인 투표소 건물 밖으로 걸어나왔다. 홀로 있을 수 있던 고요한 그 공간을 뒤로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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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2013. 8.)

영화 2013. 9. 2. 00:22



1. 오랜만에 본 왕가위 영화. 내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로 인한 얼마 안된 정말 일천한 일이기에 몇년전에 화양연화를 처음 보고 왕가위 영화를 몇개 찾아서 봤던게 전부다. 아비정전을 보고 중경삼림을 보고 타락천사를 봤다. 나중에 동사서독도. 왕가위는 딱 거기까지만. 아마 대부분이 그러한 것 같지만 왕가위 팬이 된 결정적 계기는 화양연화와 중경삼림.


2. 연출은 정말 끝내준다. 정말정말. 버릴 수 있는 컷이 별로 없다. 보는내내 "저 미장센을 도대체 어쩔거야."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했다. 그의 영화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정말 하악하악대며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이들은 아마 두시간 남짓동안 그저 잘 찍은 CF를 연속으로 보는 느낌일 것이다.


3.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무협'


4. 송혜교가 아무리 예쁘다한들 장만옥보다 치파오가 더 잘 어울릴리 없다. 그런 여배우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5. 화양연화도 그렇지만, 이 영화도 사실은 인간이나 삶, 인연 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듯하나 사실은 홍콩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화양연화가 그 마지막이라면 이것은 그 시작에 대한. 

(화양연화가 어째서 홍콩의 마지막에 대한 영화인지는 아마 나중에 여기에 길게 쓸 기회가 있을 것 같다.)


6. 이와 관련하여, 익히 홍보된 바와는 달리 이 영화는 엽문영화가 아닌거다.


7. 편집된 부분이 엄청 많아 보인다. 몇년 후에 완전판 나오길. 그래서 구성상의 아쉬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뭐 그런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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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았다. 역시 이런 류의 영화는 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드물다.


2. 부자의 삶의 편력은 반복되기 마련. 그 대물림에 몸서리쳐졌다. 떠나는 소년의 뒷모습이란. 여성은 부자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어느정도 존재의 문제에 가깝다.


3. 우연에 기한 전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단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 전개를 더욱 운명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게 보인다.


4. 두가지 영화가 겹쳐 보였다. 하나는 숲에서의 그 장면, 밀러스 크로싱과. 다른 하나는 웃음 하나없이 진지하기만 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웃은 장면이었는데 "I am your father. Search your feelings; you know it to be true."라는 다스베이더의 저 유명한 대사가 중간에 그대로 등장한다. 아마도 그 대사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지 상영관에서 그 부분이 나올 때 유일하게 나혼자 웃었다. ㅎㅎ


5. 나중에 다른 매체로 등장하면 어떻게든 구해놓을 예정. 어떤 형태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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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적 실패를 도덕적 해이로 판단당하는 현실과" -빅이슈 59호 편집장 글머리 중. 


여느때처럼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건너편의 그는 책자를 손에 쥐고 팔을 들어 외치고 있었다. 그가 외치고 있는 책자의 이름은 그가 홈리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당당하게 서있는 그의 자세와 표정과 눈과 소리는 그러한 사실에 내가 익히 보아오던 홈리스들의 모습에 전혀 상응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지나치던 나는 그를 잠시 지난 지점에서 잠깐 멈춰서서 간간히 사서 보던 남성지들이 요즘에 볼 내용이 없더라는 생각을 반추해내고 몇가지를 좀 더 생각해보고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 새로 택배로 얻은 옷이 스스로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다가가 돈을 주고, 잡지를 하나 얻었다. 오늘같은 날씨에 몇시간동안 서있으면서 그렇게 외쳐대고 있어서인지 돈을 주면서 닿은 손 끝이 차가웠다. 이에 책자를 받아 돌아서면서 나는 겸연쩍었다. 그리고 약간의 무언가 섭섭함과 미안함과 고마움과 등의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러다 나는 내가 딱히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는 없음을 생각해내고,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잡지 안의 저 글을 보고 그의 그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201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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